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1 운동 (문단 편집) === 독립 선언 === [youtube(zxAXdxu55dI)] [[파일:attachment/31-3.jpg]]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만국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깨우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운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는 하늘의 지시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천하의 어떤 힘이라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천 년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으니, 그 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오래 전부터의 억울을 떨쳐 펴려면, 눈앞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눌러 오그라들고 사그라져 잦아진 민족의 장대한 마음과 국가의 체모와 도리를 떨치고 뻗치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딸 아들에게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구하고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끌어 대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의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어 굳게 결심하고, 인류 공통의 옳은 성품과 이 시대의 지배하는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라는 무기로써 도와 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취하매 어느 강자를 꺾지 못하며,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원한과 분노에 쌓인 2천만 민족을 위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인하여서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굴대인 4억만 [[지나#s-3]] 민족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두려워함과 시새움을 갈수록 두텁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니[* 이 부분을 두고 최남선이 당시 시대적 정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하면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당시 중국은 여러 개의 군벌들이 제각기 땅을 차지하고 서로 치열한 내전을 벌이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사분오열된 중국이 일본을 경계하여 일본을 망하게 한다는 기미독립선언서의 내용은 현실과 전혀 동떨어졌기 때문. 실제로 일본을 패망시킨 것은 중국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러한 서술을 두고 최남선 본인의 정신 세계가 중국을 숭상하는 모화사대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다.], 오늘날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붙들어 지탱하는 자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지나으로 하여금 꿈에도 잊지 못할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써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단계가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리요? 아아,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도다. 위력의 시대는 가고, 도의의 시대가 왔도다. 과거 한 세기 내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적 정신이 이제 막 새 문명의 밝아 오는 빛을 인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였도다. 새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구나.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켜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 문화를 맺게 할 것이로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어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공약 3장 1.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 인도와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마라. 1.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하게 발표하라. 1. 모든 행동은 질서를 존중하며,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단기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3·1독립선언서는 3·1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역사적 문서로 이후 발표된 수 많은 선언서의 모태가 되었다.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밝힘으로써 우리 겨레의 강한 독립의지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 이것인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에 연결되었음을 강조하였다. 3·1운동의 행동강령인 '공약삼장'을 통해 결연한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3·1정신이 집약된 결정체이자 상징물인 독립선언서는 국외 한인사회까지 널리 퍼져 3·1운동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 >[[독립기념관]] 공식 소개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독립운동가)|정재용]]의 육성 증언 동영상과 3월 1일 [[경복궁 광화문|광화문]] 앞에 모인 인파 사진. 현대의 [[교보생명]] 앞에 있는 칭경기념비각 앞이다. 사진 중앙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하얀 보자기를 들고 있는 학생이 훗날 [[남로당]]의 거두 이정 [[박헌영]]이다. 한편 [[탑골공원]]에선 민족 대표들의 갑작스런 시위 장소 변경에 '''당황하여''' 학생 그룹에서 [[강기덕]]을 보내 찾아다니다가[* 강기덕 외에도 김문진과 한국태도 같이 간 모양이지만 정확히 누가 같이 갔는지는 진술이 엇갈린다.] 그들이 태화관에 틀어박혀 있는 걸 찾아내고 민족 대표들에게 항의하였으나 최린과 손병희에게 공원에 가서 발표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답변만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독립선언서를 받는 경위, 태화관에서 발표가 점심 식사 전에 있었는지, 아니면 경찰이 온 뒤에 있었는지에 대해 자료마다 다르다. 학생 그룹은 그들로부터 독립선언서만 받아내고 독자적으로 움직여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독립운동가)|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만세 운동에 참여하거나 혹은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한 일반 민간인들이 가세하여 수십만 인파가 모여들어 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시위대는 한편은 [[보신각]]을 거쳐 [[숭례문]] 쪽으로 향했고 다른 한편은 [[시청앞 광장|덕수궁 대한문]] 쪽으로 향했다. 시위대가 다시 종로로 향하자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가 시위대를 폭압적으로 진압하려고 했으나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다가 오후 6시에 자진 해산했다. 3월 2일이 되자 [[조선총독부]]는 전 병력을 동원해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들을 마구 연행했는데 이 날 하루에만 무려 1만여 명이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평양시]], [[의주군]], [[선천군]], [[안주시]], [[원산시]], [[남포시]]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음날인 3월 2일에는 이북 전역으로 만세 운동이 확산되었다. 3월부터 4월 사이에 전국적으로 수천 회의 만세 시위 운동이 벌어졌고[* 일제 측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기록에 따르면 3월과 4월, 2개월 동안 618군데의 장소에서 848회의 만세 운동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만세 운동을 진압하려고 우츠노미야는 일본으로 육군 파견을 요청해서 포병대대 및 헌병, 보조헌병을 합해 4천명 이상의 [[일본군]]이 진압에 투입되었다.] 일본은 이를 강압적으로 진압하여 각처에서 [[학살]] 사태가 속출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제암리 학살사건]]이다. 만세 운동은 3월 초부터 일제의 [[과잉진압|탄압과 만행]]이 시작되면서 이에 대한 저항으로 일본 헌병 등을 때리거나 경찰서 등을 파괴하는 식의 폭력 시위 양산을 처음부터 안고 있었으며 후기 만세 운동은 직접적인 불만이 많았던 농민과 노동자에게까지 확산되어 운동의 폭력적 양상이 더욱 심해졌다. 한편 "대한 독립 만세" 는 일종의 상징처럼 굳어진 구호지만 사실 3.1 운동 당시에는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가 많이 쓰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대한 독립 만세'라고 외쳤다고도 하지만 국호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었어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조선'이라는 국호가 더 친숙했다.[* 해방 직후 세워진 [[조선인민공화국]]([[북한]]이 아니다!)만 봐도...] 당시의 신문 보도나 3.1 운동 이후 전국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 전단지에는 '조선 독립 만세'라고 적힌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당장 [[기미독립선언서]]에도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적혀 있었다. 한편 3.1 운동 하면 떠오르는 현대의 이미지는 대체로 [[한복|백의]]를 입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외치는 다수의 운동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실제 3.1 운동 현장의 모습은 이와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당대의 재판 기록을 살펴보면 3월 1일 당일에 [[태극기]]가 사용됐다는 증언은 보이지 않고 당시 서울 [[YMCA]] 회관에서 만세 운동을 관찰한 이의 일기([[윤치호]]일 것으로 추정)에 따르면 당시 대중들은 모자와 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적게 쓰였을 뿐이지 안 쓰인 건 아니었고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이뤄짐에 따라 서서히 태극기가 만세 항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충청남도]] [[대전시|대전군]] [[유성구|유성면]]에서는 조선이 독립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마을 한복판에 태극기를 달았으며 [[전라남도]] 연안에서는 어선들이 태극기를 단 채 조업을 벌이기도 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국내 3․1 운동 2: 남부, 2009, 12쪽 및 213쪽.] 다만 당대의 공판 기록이나 일기에 따르면 태극기보다는 <독립기>가 더 자주 휘날렸다. 독립기는 대체로 흰 천에 '독립 만세' 따위의 글귀를 붓으로 써 놓은 것으로 태극기 없이 독립기만 휘날린 지역도 많았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태극기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했다. 다만 3.1 운동에 참가한 민간인들은 국제 정세에 대해 매우 어두웠다. 한 예로 1919년 4월 1일 오전 10시 [[황해도]] 해주에서 5천 장의 전단지를 뿌리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5명의 여자들은 "우리가 일제히 독립을 외치면 세계의 이목은 우리나라로 집중될 것이요, 조선은 세계 강대국의 동정을 얻어 민족자결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출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그러나 3.1 운동에 200만의 조선 민간인들이 참가하여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어도 세계 강대국들은 끝끝내 조선 독립을 외면했다.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어떤 나라가 압력을 가해 조선을 독립시키게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결국 조선의 독립은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1945년]] [[8월 15일]]로 미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